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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한계 -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by wizmusa 2003. 12. 27.
 Final Paper

-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 마크 트웨인을 위한 변명 -


I. 서  론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통해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면서 여러 평론가들에게 ‘작가들의 작가’로서 다른 작가들에게 새로운 창작 방법을 제시했지만 허무맹랑한 결말로 소설 전체의 격을 떨어뜨렸다는 찬사와 비난이 뒤섞인 평가를 받아왔다. 기존 작품과의 차별성에 있어서는 어떠한 비난도 감히 깎아내릴 수 없었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마크 트웨인은 그가 받는 찬사의 이유로 거론되는 소설 창작의 새로운 기법 외에도 독특하고도 전형적인 미국식 인물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등장한 톰 소여같이 부유하면서도 남의 재산에 탐을 내지 않고 모험을 즐기는 인물은 다른 나라의 문학 작품에서는 찾기 힘들다. 또한, 마크 트웨인이 완성한 2인조 형태의 이야기 전개는 소설과 영화 등 매체를 막론하고 미국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마크 트웨인이 기초를 닦은 미국적 인물상 중에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예도 있는데 그 중 자주 거론되는 것이 짐으로 대표되는 흑인상이다. 이는 자주 다뤄진 문제로 마크 트웨인 나름대로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서술한 것이겠지만 흑인이라는 하나의 당당한 인격체를 말 많지만 착하고 순종적이고 희생적이라는 백인의 입맛에 맞는 성격으로 정형화함으로써 흑인의 인격을 무시한 결과를 낳았고 그가 만든 인물상은 현재까지 두고두고 악용되는 선례가 되고 말았다. 또한, 톰 소여라는 인물은 자신의 모험을 위해서라면 짐이라는 버젓한 인격체를 장난감으로 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이를 요즘 문제 거리로 떠오르는 오만한 미국에 이어지는 맥락이라고 본다면 비약일까? 어쨌든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 같이 자신을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도구로 쓸 수 있는 인물상을 어린 아이의 모습을 통해 교묘히 정립시키고 만 것이다. 물론, 노예근성을 가진 짐이나 안하 무인한 톰 소여가 전형적인 미국적 인물상으로 형성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마크 트웨인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끼친 후대에 끼친 영향을 미루어 보아 그에게 상당한 책임을 지울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허크를 제외하고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짐과 톰 소여 이 두 사람은 마크 트웨인이 생각하는 인간의 정의와 그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과연 마크 트웨인이 두려워하여 지레 포기했을지 모르는 한계는 무엇일까?



II. 본  론


 마크 트웨인은 짐을 일관성이 결여된 묘사로 <허클베리 핀의 모험> 초반, 중반과 후반의 성격이 달라지고 마는 인물로 만들었다. 짐은 초반에는 미신을 굳게 믿는 어수룩한 노예로 중반에는 허크의 아버지 역할까지 맡는 인간적인 인물로 종반에는 어린 아이들의 모험심에 노리개로 취급받다가 탈출의 기회까지 포기하는 순종적인 노예로 표현되고 말았는데 이렇게  흑인들을 희화화하여 묘사했던 것은 마크 트웨인이 처음은 아니다. 19세기 미국 사회에 유행했던 민스트럴 악극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뮤지컬 쇼가 그러한 흑인 희화화 풍조의 효시로 당시에는 백인가수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의 민요나 흑인풍의 가곡을 노래하는 것이 인기였다고 하며 마크 트웨인은 1840년대에 그러니까 유년기에 이 악극을 보았다고 한다. 주로 공연했던 소재로는 두 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2인조 희극이었는데 이들은 벤조(benjo)를 켜고 뼈다귀들을 흔들면서 흑인들의 방언을 흉내 내고 괴상한 의상에 괴상한 노래를 부르며 관중을 웃기는가 하면, 때로는 무대 위에서 둘이서 코가 맞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 대면하여 서로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으름장을 놓으며 흑인들이 싸우는 흉내를 내어 관중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흑인을 희화화하여 웃음의 소재로 삼는 것은 마크 트웨인의 시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또한, 1820년대 민스트럴 쇼의 아버지로 일컫는 백인가수 토머스 D. 라이스는 자신의 춤과 노래에 ‘짐 크로(Jim Crow)’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 말은 민스트럴 쇼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의 명칭으로 굳혀졌는데 이윽고 흑인 일반을 지칭하는 차별적 언어로 정착되고 말았다. 마크 트웨인이 흑인 주인공의 이름을 짐이라고 붙인 것에는 이러한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소설 초반에는 흑인을 희화화하는 것에 개의치 않던 마크 트웨인은 소설 중반부터는 짐을 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묘사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중단했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집필을 다시 재개하고부터는 남부의 사회상을 매섭게 비판하면서 한 편으로는 짐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당시 미국의 흑인은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흑인 한 명과 백인 한 명이 배를 타고 갈 때 당시의 미국인들은 사람 한 명과 검둥이(nigger) 하나가 온다는 식으로 얘기했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 내에서도 사람은 죽지 않고 검둥이 하나만 죽었다는 대화가 오갈 정도로 흑인의 인권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때였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전체를 놓고 봐도 흑인이 man이나 human, people로 지칭된 적은 없다. 어느 정도 동정심을 가지고 잘해준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가축과 같은 nigger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허크의 생각도 소설 초반에는 당시의 기준과 같이 짐을 검둥이로 여길 뿐이었지만 독자들은 작품이 중반을 지나면서 허크가 그러한 검둥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나아가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작품의 종반에 이르러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짐을 구하겠다는 허크의 선언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한다. 허크가 이렇게까지 심경의 변화를 느끼게 된 이유는 짐과의 여행 때문이다. 짐과 여행을 하면서 단순히 가축 중의 하나인 검둥이로만 느꼈던 짐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백인들과 똑같이 감정을 느끼는 인간임을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짐과 허크가 탄 뗏목에서 둘은 평등한 위치에서 인간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짐은 한 가정을 꾸렸던 어른답게 허크의 불침번 임무를 대신 하는 아량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흑인을 ‘대접’하는 행동은 당대의 보수적인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가져다주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보고 있으면 노예제도폐지론자(abolitionist)들을 경멸하는 사회 풍조를 알 수 있다. 흑인 노예를 인간적으로 대접해주는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급진적이고 반사회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므로 흑인의 인권 신장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글은 당시 미국 사회의 주류에게 멸시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마크 트웨인은 백인 부랑아와 탈주한 흑인이라는 비주류 계층을 이용하여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깬 우정을 그려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주류 계층이라고 할지라도 허크는 백인이었다. 마크 트웨인이 미국 사회 주류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 실제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마크 트웨인 자신은 가까운 흑인 몇몇에게는 친절히 대했으리라고 본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짐의 위상으로 추측한다면 그런 예상이 가능하다. 실제로 당대의 다른 작가들에게서 흑인을 하나의 당당한 인격체로 다룬 작품을 찾기는 힘들다. 연대가 조금 앞서지만 에드가 앨런 포우의 <황금 풍뎅이 The Gold Bug>에서는 한 흑인 몸종이 나오는데 노예근성에 게으르고 푼돈에도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만 주인의 안위를 위해서는 곁을 떠나지 않는 충실한 노예로, 역시 백인의 입맛에 맞게 그려지고 있다. 그 밖의 당대의 다른 작품에서는 흑인이 아예 그려지지 않거나 노예로서 작품 내에서 별 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따라서 최소한 그의 흑인에 대한 인식이 당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깨어 있었기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같은 작품이 나왔으리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아내는 소위 ‘잘 사는 집’의 딸로 주류 사회의 일원이었고 그의 직업은 작가로서 당시의 문화적 여건으로 볼 때 백인 중류층을 상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마크 트웨인이 작가로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괜스레 흑인을 보통 백인과 같이 대하여 중상류층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됐을 것이라고 한다면 편견일까? 만약 마크 트웨인이 한가로운 시골길에서 흑인과 일대일로 만난다면 마크 트웨인의 예의 유머를 구사하며 그들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북적대는 파티 장에서 흑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대해야만 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마크 트웨인은 세간의 이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그와 허크를 동일시한다면 흑인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다른 백인이 끼어들었을 때 마크 트웨인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을 소설에서 톰 소여가 등장했을 때의 허크가 취했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허크가 존중해마지 않는 톰 소여는 어린 나이인데도 여러 가지로 선망을 받던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초반에는 톰 소여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톰 소여라면 했을 것이다’, ‘톰 소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식으로 톰 소여는 무척 신뢰받는 판단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톰 소여의 그늘은 무척 커서 소설의 초중반을 거치면서 인간애를 배우고 남부 사회의 잔인함에 거부감을 느끼며 성장을 했던 허크는 톰 소여를 다시 만나면서 그 신선했던 행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학교에서 교육 받은 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아 자신의 경험만으로 모든 판단을 해야 했던 허크는 소설 초반에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만 성장을 해가면서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었는데 톰 소여를 다시 만나면서는 그에게 최종적인 판단을 맡기는 바람에 애써 이룬 성장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또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톰 소여는 현대의 흑인 독자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데 단순히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이미 자유의 몸이 된 짐을 톰 소여는 자신이 읽었던 책에서 본 것을 여러 가지로 시도하기위해 장난감처럼 써먹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마크 트웨인을 허크에 이입시킨다면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로 대변되는 미국 사회의 주류와 같이 하는 이상에는 흑인을 그 상태 그대로 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체념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 혼자서 사회적 통념이라는 거대한 벽을 한 번에 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서운하고 때로는 분노하게지만 마크 트웨인에게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모두 무시하라는 것은 무리한 바램이다. 자기 자신을 놓고 생각해봤을 때 마크 트웨인보다 잘할 수 있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흑인의 인권 면에서 부족하다고 여기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출판되었던 당시에는 여러 백인 비평가들이 당시의 상류문화 전통(genteel tradition)에 준해 평가되어 이 작품에 나타나는 거짓말들이나 비정통적인 문법 또는 반종교적인 행위 등을 들어 ‘순전한 쓰레기(veriest trash)’로 간주되었다. 마크 트웨인은 이미 반발자국 앞선 사람이었던 것이다.



III. 결  론


 이제까지 언급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격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아 왔다. 격찬의 이유는 흑인이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것을 작품에서 다루는 자체를 터부시하는 당시의 문학 전통을 타파한 점, 비이성적이고 잔인하며 위선적인 남부의 현실을 폭로했다는 점,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주의 결과로 생겨난 도덕적 질서의 전도 또는 도덕적 딜레마를 사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는 점, 미시시피 강 연안 자연을 뛰어난 묘사로 서술한 점들로 평론가들마다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반면 비판의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결말 전개의 일관성 부재, 백인이 바라는 노예상으로 정형화한 흑인 인물 묘사 등 비판자의 인종 등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그 초점이 달라진다. 그러한 비판의 이유는 타당하다. 하지만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두고 자신의 희생하여 사회 체제를 뒤엎으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마크 트웨인의 심경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으로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탈고했을 때 실제로는 이만하면 흑인에 대해 지나치게 잘 말해주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독자는 어디까지나 인종적으로 백인이었고, 지역적으로는 중서부 농경 지역이었으며, 사회 계층적으로는 엘리트층이 아닌 일반 대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우려대로 그는 출간 후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백인 사회 주류층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과연 그의 이상을 전부 썼는지, 덜 썼는지 아니면 그의 이상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썼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그가 결국 출간한 결과물은 당시 백인 사회 주류층의 기준에 벗어난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것이 지금의 기준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마크 트웨인이 그가 사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보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작품의 말미에서 허크가 문명화되기를 거부하고 인디언 부락으로 떠나기로 결정하는 것이 단서가 되지 않을까? 이로써 마크 트웨인이 생각했던 최선은 자신 혼자서 바꿀 수 없는 백인 사회를 떠나 작품 속의 허크처럼 인디언 부락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마크 트웨인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변혁을 시도한 것으로 인권 면에 있어서는 선각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니라고 봐야한다. 따라서 현대의 독자는 당시의 기준과 현대의 기준을 비교하여 마크 트웨인이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시 사회의 그릇됨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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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도에 쓴 글입니다. 기회를 만들어 전체적으로 수정해야겠습니다. 시간에 쫓겨 쓴 글이라 해도 영 매끄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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