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이 가진 여력은 죄가 아니다.
여력이라는 개념을 비효율이나 태만으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배임 같이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낡은 개념이다. 이제는 무식하게 부지런해 봐야 망하는 길로 직행할 뿐이다. 한국이 그만큼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여력은 지속가능하다는 증거이다. 과거에는 변화하는 속도가 느려 극단적으로 효율을 추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정치 로비를 하고 독과점을 유지하면 그편이 얻는 게 많았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여력이 없는 조직은 변화에 휩쓸려 죽는다. 문제는 얌전히 죽지 않고 그 조직이 속한 사회의 다른 구성원을 물귀신처럼 붙들고 같이 죽는다는 점이다.
역량이 없는 조직으로서 선도 조직을 직간접적으로 본받아 역량을 쌓으며 성공한 나라가 한국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하청을 받아 부단히 만들어서 속속들이 내재화했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을 그대로 가져와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면 히트를 치곤 했고, 미국에서 라이선스를 사다 한국에 생산라인을 만들면 꾸준히 팔렸다. 이러한 성공경험은 꽤 오랫동안 금과옥조인 것 마냥 가감 없이 적용해도 또 다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시간투입이 곧 성과총량이 되었다. 무엇이 더 좋을지 궁리하기보다는 빨리 빨리 쫓아가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은 더이상 목표가 되어 주지 못한다. 우리도 발전할 만큼 발전하여 그 다음 단계를 가본 선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세계가 평평해지면서 플랫폼을 장악한 글로벌 기업은 직접 장사를 하면 그만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제까지는 노래방처럼 다른 동네에서 가치를 이미 증명했거나 반도체처럼 생산주문 받은 아이템을 열심히 갈고 닦으면 충분했는데, 오늘부터는 홀로서기 하여 아이템을 발굴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자자분한 개선은 한계에 부딪혔으니 그 벽을 뛰어넘거나 때려 부숴야 생존이 가능하다. 이제 시간투입이 성과총량이 된다는 성공경험(철학)은 오히려 창조/파괴적 혁신에는 방해가 된다. 우리만의 북극성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동산과 부동산이 많은 정도로는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여 주가는 나날이 곤두박질칠 게 뻔하다.
북극성을 찾아내고 난 후에 창조와 혁신이 가능한 역량을 육성하기에는 너무 늦다. 경쟁자는 우리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방향 탐색과 역량 육성은 병행해야 적시에 폭발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지지부진 추진하면 이내 알아챈 경쟁자가 따라잡고도 남는다. 방향을 찾는 일에는 이견이 없겠으나 역량을 육성하는 방법에는 각론이 많은 게 현실이다. 심지어 사람과 기술은 살 수 있으니 키울 필요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 이 말만 피해도 조직은 중장기적으로 성공할 것이다.
방향을 정확히 잡지 못한 상태에서 로켓을 만드는 듯한 역량을 키우는 방법은 작은 실험, toy project를 반복하기이다. 당장 매출,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여력이 있어야만 가능하기도 하다. 실험적이랍시며 아무렇게나 해대면 조직구성원이 심적으로 헤매며 정말 별 소득도 없게 되니, 이 또한 경영의 묘가 필요한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조직이 잉여력을 계속 보일 수 있다면 경영을 참 잘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투자자 입장에서 중견기업과 대기업을 평가하는 기준이 하나 더 생겼다고 보아도 좋겠다. 전에는 재무제표만 보았지만 이제 해당 조직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제대로 된 기업이라면 IR을 통해 홍보할 것이다. 구글이 논문을 발표하고 오픈소스에 기여하며 사내복지를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기업의 여력은 공작새의 꼬리깃보다 쓸모가 크고 실질적이다.
때문에 주가를 관리하는 기업은 단순히 사내유보금을 쌓아 두기만 할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력을 가지고 창조할 수 있는 재료를 축적하며 역량을 키우게 해야 한다. 기업이 가진 여력은 공작새 수컷이 가진 화려한 꼬리깃과 같다. 움직이는 데에 방해만 되고 눈에 잘 띄게까지 하는 깃털을 주렁주렁 달고도 포식자를 잘 피하며 성장했을 정도로 원숙함을 과시하는 수컷은 암컷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승자독식 판에서, 어떤 기업이 투자를 받으며 시가총액을 늘려갈 수 있을까? 여력이 있어서 미래를 준비하며 결국은 대박을 칠 기업이다. 아등바등 부지런한 척하기만 하는 중견기업, 대기업은 브랜드 파워마저 잃는 순간 철저하게 외면 받게 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칼자루는 경영진이 쥐고 있다.
※ 스타트업은 이미 아이템을 확정한 조직이니 부단하게 달려나가기만 하면 된다. 단, 아이템이 시장에 맞지 않다고 하면 이미 갖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는 피보팅이 불가피하다. 중견기업, 대기업과는 움직임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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